카르마. 그리고 샌드위치



 베를린과 암스테르담의 휴가+출장을 위해 서울역에 직통열차를 타러 갔다. 
 항공 수속 과정이 약간 딜레이가 되어 직통열차 표를 바꾸기 위해 티켓 카운터에서 직원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백발이 성성한 노신사가 초조한 기색으로 나와 직원과의 대화 중간에 끼어 들었다. 나와 마찬가지로 베를린으로 향하는 그는 비행 시간에 늦은 모양이었고, 가장 빨리 인천공항에 가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 그리고 서울역에서 체크인이 가능한지를 그가 직원에게 물어보았다. 직원은 영어가 약간 서툴렀다. 이런 식의 새치기 매너가 달갑지 않았지만, 그의 질문들에 대신해서 대답을 해 주었고, 'Thank you' 하면서 그는 어딘가로 향했다. 

 시간대를 변경한 직통열차 티켓을 들고 플랫폼으로 향했다. 그가 그 곳에 서 있었다. 나를 보며 반가워하며 좀 전의 도움에 그가 다시금 감사를 표했다. 기차에 탑승한 그는 내 근처로 자리를 잡았고, '너 영어를 참 잘 하네. 어디서 영어를 공부했니'로 대화는 시작되었다. 인천공항에 도착하기까지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이어졌다. 그가 건네준 명함에 새겨져 있는 그의 이름은 J. Christian B. Kirsch. International Delphic Council 라는 단체의 Secretary General 직을 담당하고 있다고 했다. 한국과의 연이 깊은 분인데, 북한과 한국의 아트워크들을 세상에 알리는 프로젝트를 진행중이며, 평양에도 몇차례 다녀온 분이라 대화는 참 신기하고 즐거웠다. 내가 가보지 못한 평양 얘기, 분단이 되었던 상황의 베를린 얘기, 한국의 정치 상황, 트럼프를 위시한 세계의 질서 변화, 아트와 테크놀로지의 한계와 융합 등등. 많은 분야에 있어 깊은 인사이트를 가진 분이라 짧은 시간동안 느낀 점이 많았다. 부인은 동독 출신인데,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후에 만나 25년간의 결혼생활을 하고 있다고 했다. 남한에서 태어나 북한 사람을 만나본 경험이 없는 나 보다, 분단이라는 현실을 직접 겪은 그가 한국의 분단상황에 대한 생각이 더 깊어 보였다. 

 인천공항에 도착할 즈음, 그가 내게 도움을 요청했다. 비행기 탑승 시간까지 시간이 좀 촉박하니 체크인 등등을 도와달라고. 비행기 탑승까지 시간의 여유가 있어서 서슴없이 도와주겠다고 했다. 대한항공 체크인 카운터로 갔는데 대기 줄이 너무 길어 내가 갖고 있는 모닝캄 서비스로 짧은 줄로 모시고 가 체크인 부스 앞에 섰다. 다리가 불편하시다하여 카운터 스탭에게 부탁하여 좋은 자리도 잡아 드렸다. 내 친절이 마음에 와 닿았는지, 그는 스탭에게 나를 가리키며 'He is my guardian angel.'이라고까지 말했다. 

 체크인을 모두 마치고 나는 볼일이 있어서 그를 먼저 시큐리티 체크로 보내야 했다. 헤어질 무렵 그가 말했다. '너는 참 좋은 녀석이다. 그리고 이런 친절은 모두 karma가 되어 너에게 돌아갈거야. 나는 금요일에 사무실에 하루종일 있을테니 시간 나면 놀러와라.' 따뜻하게 악수를 나누고 우리는 헤어졌다. 둘 다 베를린으로 향했지만, 그는 모스크바 경유, 나는 암스테르담 경유 스케줄이었다.  


 그로부터 10여시간이 지난 후, 나는 암스테르담 스키폴 공항에 도착해서 장시간 비행의 피곤에 찌든 몸으로 환승 게이트로 향했다. 뭔가 어수선한 분위기. 대기줄도 없어서 뭔가 이상하다 싶어 스탭에게 물어봤더니 기상악화로 베를린으로 가는 비행기가 취소되었단다. 농담이지? 싶어서 비행기 스케줄 스크린을 확인해보니 빨간 폰트로 'Cancelled'라고 표시된게 눈에 들어왔다. 

 안돼. 나는 10시 비행기를 타고 오늘 꼭 베를린에 가야해. 지원이랑 원선형이랑 유림이랑 만나서 Our Berlin 애들이랑 파티하기로 했단 말이야!!

 스키폴 공항에 네시간 넘게 체류하면서, KLM 담당 직원들과 향후 내 운명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 본 결론은 오늘 절대 베를린에 갈 수 없다는 것. 암스테르담에서 하룻밤 묵고 다음날 세시 비행기로 베를린에 가는 것이 베스트 옵션. 

 그래서 나는 지금, Hotels.com에서 부랴부랴 찾은 싸구려 호텔 방에 앉아 이 글을 쓰고 있다. 엄밀히 따지면 사건이 발생한 그 다음날 아침에 이 글을 쓰고 있다. 무료로 제공되는 물도 없는 싸구려 방. 어젯밤 목욕을 하고 (다행히 욕조는 있다) 노곤해진 몸으로 1시 쯤 잠에 곯아 떨어졌는데, 새벽부터 울려대는 한국에서 오는 이메일 알람과 시차의 콤비네이션 공격에 새벽 4시에 기상. 대충 업무를 마무리하고 다시 잠을 청했으나 실패하고 바깥 산책을 나갔다가 돌아와 이 글을 쓰고 있다. 

 Christian 아저씨가 Karma에 대해서 얘기하며 좋은 일을 하면 곧 선을 행한 사람에게 그게 돌아간다, 고 했지만, 어제 오늘은 그걸 돌려받는 날이 아니었구나, 하고 생각하고 있다. 오늘은 좋은 일이 있겠지, 그리고 다음주 화요일의 프리젠테이션은 멋지게 해 낼 수 있겠지. 

 
 PS. 스키폴 공항에서 항공권 변경과 호텔 예약을 모두 마치고 택시를 타러 승강장으로 갔는데 대기줄이 엄청나게 길었다. 30분 가량을 기다렸는데, 함께 기다리고 있던 아주머니와 '대기열이 엄청 길군요' 하면서 또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아주머니는 내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엄청 반가워하며, 지지난주에 한국에 휴가를 다녀왔다고 했다. 이 얘기 저 얘기를 나누다가, 오늘 내게 있었던 비행기 결항과 관련한 불행을 듣더니 참 안타까워하며 '너 엄청 배고프겠구나'며 자기가 갖고 있던 샌드위치를 나눠주었다. 호텔에 도착한 시간은 밤 11시 무렵. 호텔 주변에는 식당도, 바도 아무것도 없었고, 호텔 레스토랑도 막 문을 닫은 참이었다. 카운터에서 구입한 하이네켄 두 캔과 함께 먹은 그 샌드위치는 내가 지금까지 먹은 샌드위치 중 최고였다.   




 



by spaceboy | 2017/06/23 15:25 | Ignition : thoughts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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