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닐




암스테르담에 갈 때마다 들르는 City Records. 
1년에 한 번씩만 가는 셈인데, 주인장인 Jasper가 날 기억하고 반겨준다 




 우연찮게 바이닐을 모으기 시작했다. 절반은 와이프의 성화로 작년에 턴테이블을 구입한게 그 계기. 아직도 컬렉션이 100장도 채 되지 않으니 아직 '컬렉터'라고 부르기에는 한참 멀었지만, 어쨋든 최근 1년 동안 음반 관련 지출은 바이닐 밖에 없다.  
 
 1년에 몇 번은 암스테르담 등으로 해외 출장을 가는 편인데, 출장지 혹은 여행지에서 중고 레코드를 주로 수집하는 편이다. 해외에서 구입하는게 한국 보다는 싸고 제품이 많기 때문에 한 번에 30장은 넘게 사는 것 같다. 그 엄청난 무게 때문에 체크인 카운터에서 진땀 뺄 때가 종종 있다. 이제 해외여행을 가기 전에 여행지의 레코드샵을 구글로 뒤져보는게 약간은 습관처럼 되기도 했다. 여행의 즐거움 위에 뿌리는 또 하나의 즐거운 양념이 되었다고나 할까. 여행지에서 무료할 때, 동네의 레코드숍에 가서 레코드 사이에 손가락을 집어넣고 한장한장 넘겨가며 괜찮은 녀석이 나올때까지 디깅하는건 참 재미난다. 이런 식으로 어릴 때 즐겨들었지만 그 동안 잊고 살았던 레코드를 찾은 게 꽤 많다. 

 좀 귀찮은 취미이기도 하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들고 이동을 할 때 무게도 무게지만 가격도 만만찮다. '매달 10만원 어치 바이닐을 사겠다.'고 와이프에게 호언장담했지만 용돈은 늘 쪼달려서 약속 안지킨지 1년은 됐다. 그리고 나처럼 중고 레코드 위주로 수집하는 사람들에게는 레코드에 데미지가 있냐 없냐는 복불복이기도 해 안타까운 순간이 많다. (암스테르담에서 구한 Billy Joel의 52nd Street 앨범과 레코드이슈에서 찾은 변진섭 2집은 컨디션이 영 별로다.) 그리고 소파에 누워서 딴 짓을 하면서 음악을 들을 때는 한 면이 끝나고 판을 뒤집는게 고양이 목욕시키는 것 만큼 귀찮고 힘들다. 소파에서 턴테이블까지 큰 발걸음으로 두 걸음 밖에 안되는 주제에. 바늘의 상태도 종종 점검해야 하며 (바늘의 상태를 점검하는 방법도 아직 모른다), 레코드판에 묻은 먼지와 고양이 털을 극세사 천으로 세심히 닦아주어야 하며 (지금까지 후후 바람 불어서 날려보낸 적만 있다), 레코드판의 컨디션 유지를 위해 방안의 습도와 온도를 최적의 환경에 맞춰주어야 한다. (이 부분은 내가 죽기 전에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데 내 레코드판 모두를 건다). 아무튼 나처럼 게으른 사람에게는 적절한 취미는 절대 아닌지도 모른다. 

 물론 좋은 점이 많기 때문에 저런 어마어마한 귀찮은 요인들에도 불구하고 바이닐을 모으고 있는 거겠지. 아날로그 사운드 예찬론자라면 누구나 말하는 '노스탤지아 섞인 지직거리는 소리'는 일단 기본으로 깔고 (촌스럽긴하지만 나도 이 부분 엄청나게 좋아한다), 자켓에서 나는 낡은 냄새, 색 바랜 자켓 그래픽, '이 세상에서 내가 제일 쌔까매!' 라고 말하는 듯한 바이닐의 색깔 (물론 블랙 말고도 많은 색깔의 바이닐도 있다만 오리지널 블랙 바이닐은 정말 엄청 새까많다) 등등. 약 10분전에 '바이닐의 귀찮은 점' 단락을 마무리하고 '바이닐의 장점에 대해서 써보자'고 모니터를 노려보지만, 소리, 냄새, 색깔을 빼면 그 외의 장점이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그렇다면 딱히 장점이라고 할 만한것도 별로 없는 바이닐을 모은다는 건, '힙'한 트렌드를 따라잡기 위한 내 내면의 허세의 발동으로 치부해야만 하는 걸까.

 뭐 그렇다고 딱히 부정적으로 몰아갈 필요만은 없는 것 같다. 아스날을 응원하는 것과 똑같다. (음악 얘기하다가 아스날을 끄집어 내다니. 딱히 닉 혼비의 스타일을 따라 가는 건 아니다). 우연찮은 계기로 15년 전에 아스날을 좋아하게 되었고, 이 망할놈의 팀은 '어쩌다가 이길 때' 기분 좋은 것 빼고는 (적어도 10시즌 전부터) 모조리 단점 투성이다. 단점을 아무리 열거해봤자, 나는 이 팀을 좋아하기 시작했고, '장점도 있다는 장점이' 단점을 덮어버려서 그게 계속될 수 밖에 없이 되어버린 것. 아직 아스날만큼 바이닐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정도는 아니지만, 아직까지는 구체적으로 표현되지 조차 못한 어떤 장점이 수많은 단점들을 덮고 있는 느낌이라 당분간은 딴 생각 없이 즐거이 바이닐을 모으게 될 것 같다. 

 지금까지 모은 바이닐 중에 내가 가장 많이 듣는 가수들은 Frank Sinatra, Andy Williams, Kim Carnes 등. 죄다 중고 바이닐이다. 이상하게 2000년대 이후의 앨범들에는 손이 잘 가지 않는다. 아예 신품 바이닐을 산 것은 채 10장도 안되는 것 같다. 요즘은 새로운 음악을 찾아 듣는다기보다는 예전에 좋아했던 음악들을, 좋아했던 가수들을 다시 찾아가는게 참 좋다. 어쩌면 내 나이가 마흔이 되면서, 살아갈 날들이 살아온 날들보다 짧아지면서, 과거로 조금이나마 더 돌아가고 싶은 기분이 가장 잘 맞아 떨어지는게 바이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by spaceboy | 2017/11/20 20:36 | Ignition : thoughts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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